고달픈 로댕, 77년 예술 인생의 100주기가 다가왔다. 그 위대한 조각가의 예술 철학을 한 권에 담아낸 시인을 추억한다. 청춘의 릴케는 한 예술잡지의 청탁으로 정상에 우뚝 선 로댕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자신만의 섬세한 언어로 돌과 청동에 수많은 생명을 불어 넣던 황혼의 조각가를 기록할 수 있는 황홀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스물일곱 가을에 예순두 살 대가와 한철을 보내며 그의 예술 세계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년 뒤 그의 조수가 되는 영광과 더불어 사사로운 오해로 해고당하는 아픔과 어색한 화해까지 두루 경험하였다. 말이 필요 없는 시간들 속에서 정신적 교류가 사치스러울 만큼 쉼 없이 땀 흘리는 육체 예술의 현장을 지켜보며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릴케의 강렬한 시선으로 우리는 로댕의 몸짓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고, 로댕의 묵묵한 땀방울은 릴케 문학의 진일보를 이끌었다.

릴케가 로댕을 찾아 파리에 입성하는 장면은 마치 에커만이 괴테를 찾아가는 과정을 연상시키는 감동이 있다. 무명 시절에도 고독했는데, 명성을 얻은 후에 더욱 고독해진 예술가를 바라보는 젊은 시선은 아름답다. 명성이란 결국 하나의 새로운 이름 주위로 몰려드는 모든 오해들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더 많은 시선과 오해들, 그것들을 해명하는 것은 길고도 힘든 과제이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는 깨달음을, 로댕에 대한 오해들은 작품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둘러싸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름의 울림과 한계를 훨씬 능가하는 절정의 예술 작품들은 대자연의 풍경들을 일일이 명명할 수 없듯이, 감히 이름 붙일 수 없는 숭고함이었다. 시인은 지도에서나 책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서나 이름을 갖는 바다가 실제로는 그저 넓음이요, 움직임이며, 깊음일 뿐인 것처럼 그에게 압도당했던 것이다.

로댕은 수년에 걸쳐 스스로를 초심자로 느끼면서, 배우는 사람의 겸손한 자세로 이런 삶의 길들을 좇아갔다. 그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아는 이는 없었다. 그에게는 신뢰를 나눌 만한 사람이 없었고 친구도 몇 되지 않았다. 그에게 자양을 준 작업 뒤에는 생성하고 있는 그의 작품이 숨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책을 많이 읽었다. 늘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을 브리셀의 거리에서 발견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책은 종종 자기 내면으로의 침잠, 자신에게 닥쳐오는 어마어마한 과제로의 침잠을 위한 하나의 구실일 뿐이었을 것이다. 활동적인 사람들이 모두 그렇듯이 그에게도 엄청난 작업이 자기 앞에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능력을 가중시키고 집중케 하는 원동력이었다.” - 23쪽

읽다보면 중요한 부분이나 감동적인 글에 밑줄을 긋는 책이 있다. 몇 장 읽지도 않았는데, 밑줄이 너무 많아지는 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감수성 넘치는 젊은 시인의 영혼에 비친 위대한 예술가의 세계가 그랬다. 이 기록이 훌륭한 것은 로댕의 사생활은 물론 그 어떤 가십거리도 언급하지 않고 작품과 작업에만 몰입했다는 것이다. 오로지 육체가 추구하는 예술 세계에만 집중했다. 시인의 주관적 감상을 벗어나긴 어려웠으나 성실한 대가의 손놀림과 일을 위해 단련된 근육에 철저히 집중하며 혼신을 바쳤다. 1902년 첫 만남에서 1부를 완성하고, 이후 몇 차례 있었던 강연을 정리하여 2부로 첨부한 것은 1907년의 일이다. 모두 56점의 도판과 함께 단정하게 정리된 한국어판 ‘릴케의 로댕’ 또한 참으로 아름다운 책이다.

두 사람은 그 가을에 맑고 고독한 깊은 신뢰로 교유했다. 릴케의 눈에 로댕은 대상이 어떤 습관적인 태도나 우연히 어떤 자세를 취할 때, 어떤 새로운 모습을 막 표현할 때, 또 피로하거나 긴장하고 있을 때, 재빨리 그 모습을 포착하는 예술가였다. 그는 첫인상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두 번째 인상도, 그리고 계속되는 그 어떤 인상도 인정하지 않으며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 속에서 관찰하고 노트했다. 언급할 가치가 없는 하찮은 움직임들과 도는 모습들, 반쯤 도는 모습들을 노트하고 수십 개의 크로키와 그보다 더 많은 프로필을 그렸다. 모델의 표정에 나타나는 온갖 변화들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자연 속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며 대상을 엄격하게 파악하고 묘사하는 훈련 방식은 놀라웠다. 로댕에게 말을 건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돌들이었고, 조각하는 손놀림과 무거운 돌을 옮기는 순간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삶의 유희에서 벗어나 언제나 일만하고 있는 모습은 충격적이다. 사색과 여유를 통해 글을 쓰고 창작 활동을 하던 릴케에게 영감보다 우선한 땀방울의 고단한 철학은 전혀 새로운 세계였다. 하고 싶은 것 다하고 놀고 싶을 때 다 놀면서 어느 세월에 성취할 수 있겠느냐는 꾸짖음이 무겁게 밀려와 시인의 영혼을 흔들었다. 과묵했던 로댕은 노동의 성실함을 일관되게 반복하고 있었다. 상상을 억압하며 그저 꾸밈없이 성실하게 작업했다. 쉬지 않고 일하는 고단한 노동자였다. 파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릴케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놨을 때, “계속해서 일 하십시오.”라는 건조한 대답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영감이나 천재성 보다 우선하는 끊임없이 갈고 닦는 실천 앞에서 릴케 문학의 미래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 가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어떤 것이라도 이해한다. 만물에는 똑같은 법칙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조각을 공부했으며, 그것이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특히 그 셋째 권에서 하느님이란 말이 나올 때마다 그 대신에 조각이란 낱말을 놓아보았던 일을 기억한다. 그것은 정당하고 옳은 일이었다.” - 142쪽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1875년 12월 4일,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 지배하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군인이던 아버지와 소녀 취향의 어머니 사이에서 일곱 살 때까지 딸처럼 길러졌다가 아버지에 의해 육군학교에 입학하면서 참담한 청소년기를 보내는 동안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시를 쓰기 시작했다. 스물한 살에 뮌헨에서 만난 14살 연상의 루 살로메는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아명이던 ‘르네’를 버리고 ‘라이너’로 개명한 것도 그녀의 권유 때문이었으며 두 번에 걸친 러시아 여행과 스위스, 이탈리아 등을 여행에서 영감을 받아 ‘기도 시집’을 완성할 수 있었다. 예술인 마을 보르프스베데에서 하인리히 포겔러, 클라라 베스트호프 등을 만나 어울리며 조형 예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로댕론 1부에는 로댕의 제자이자 자신과 로댕의 만남을 예비해 준 아내 클라라에게 바치는 ‘젊은 여성 조각가에게’라는 헌사를 남겼다. ‘신시집’은 로댕과의 만남을 통해 체득한 조형 예술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성과물이라 할 수 있으며 말년의 역작인 ‘두이노의 비가’ 등을 통해 죽음으로써 삶을 완성하는 존재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오귀스트 로댕은 1840년 11월 12일, 파리 빈민가에서 경찰서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드로잉과 점토 모형 제작에 소질을 보였으나 천재성과 거리가 멀었던 관계로 거듭된 낙방, 낙선, 좌절, 모함이라는 실패의 연쇄 속에서 단련되었다. 누이 마리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수도원에 들어가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했으나, 그곳에서 재능을 알아본 에마르 신부의 설득으로 작업장에 돌아올 수 있었다. 스물네 살에 ‘코 깨진 사나이’를 출품했으나 진보성을 이해하지 못한 살롱의 심사위원들에게 거부당했고, 자신의 작품이 스승 카리에-벨뢰즈의 이름으로 비싸게 팔려나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건축 장식 직공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중에도 원대한 꿈을 갖고 유럽 각지를 떠돌며 경험을 쌓았다. 서른여덟에 파리로 복귀하여 ‘청동시대’를 출품하면서 사실적 표현의 완성이라 호평 속에서 드디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점토, 석고, 대리석, 청동을 가리지 않고 생명력을 담아 피부, 근육, 표정들을 새롭게 창조했다.

“육체에는 팔이 있어야 한다고, 팔 없는 육체는 절대로 완전한 것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보잘 것 없는 고루함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상주의자들은 나무를 화면 가장자리에 의해 잘리도록 그린 것을 사람들이 거부했던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매우 빠르게 이런 인상에 익숙해졌다. 그래서 최소한 회화에 대해서는, 예술에서의 완전성이 실제 사물의 완전성과 반드시 부합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실제와는 별도로 그림 속에서는 새로운 통일성, 새로운 연관과 비례와 균형이 생긴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신뢰하게 되었다. 이는 조각의 경우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 42쪽

릴케가 발견한 조각의 언어는 육체였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보다 이틀 일찍 태어난 미켈란젤로의 열렬한 연구가였던 그의 작품이 뭔가 판을 흔들거나 뒤집을 만큼 충돌을 일으킬 성격은 아니었다. 늘 새로운 도전을 하고는 있었으나 그 나름의 전통성이 있어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데 모자람이 없었지만 비평가들에게는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1897년 작품 ‘내면의 목소리’는 외부의 도움 없이 내면에서 스스로의 몸을 감싸려고 하는 이 육체에 팔이 필요 한 것인가 질문을 던진다. 이 작품에서 미완의 느낌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관람자의 시선이 단순한 주시가 아니라 생각이 복잡해서 고루해졌다는 주장을 담았다. 극도로 예민하게 자신의 심연에 귀 기울이는 대작가의 모습을 상상케 한다. 로댕론은 이렇게 총체적으로 한 세기 이전의 위대한 작가와 위대한 큐레이터를 동시에 만날 수 있는 명작이다.

로댕은 내면의 깊이를 파고드는 생명력의 표현에 도전하여 단테의 ‘신곡’과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서 영향을 받아 8년의 대작 ‘지옥의 문’을 완성시켰다. 아담과 이브, 칼레의 시민, 발자크상도 모두 이 시기에 완성된 것이다. 특히 ‘지옥의 문’의 일부였던 ‘생각하는 사람’은 이후 독립작품으로 더 크게 제작되어 보다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르네상스나 중세 프랑스 조각품의 영향을 받았으되 새로운 도전을 통해 인상파 화가의 회화와 더불어 근대 조각 예술에 새 지평을 여는 과정이었다.

표범
- 파리 식물원에서

수없이 지나가는 창살에 지치어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그에겐 수천의 창살만이 있고
그 수천의 창살 뒤엔 세계가 없는 듯하다.

가장 조그만 원을 그리며 도는
나직하면서도 힘찬 그 사뿐한 발걸음은
커다란 의지가 마비되어 서 있는
한 중심을 맴도는 힘의 무용과도 같다.

다만 때로 눈꺼풀이 소리 없이 열릴 뿐 ㅡ
그러면 형상이 안으로 비쳐 들어가
긴장한 사지의 정적을 뚫고 지나고 ㅡ
가슴속에서 덧없이 사라진다.

로댕을 만난 릴케는 주관적이고 몽상적인 서정시의 틀을 벗어나 언어의 조형성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파리의 수목원에서 우리에 갇힌 표범의 모습을 지켜보며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중의적으로 묘사한 것이 그 첫 번째 성과물이었다. 5년 뒤 ‘신 시집’의 첫머리를 장식한 ‘표범’은 로댕의 작업 방식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다중 시선의 작품으로 로댕에 헌정되었다. 이 시는 본 책의 168쪽에도 수록되어 있으나 다소 건조한 문체라 손재준 번역 ‘두이노의 비가’ 175쪽에서 발췌하여 옮겼음을 밝힌다. 로댕은 바라보는 곳 어디에서나 삶을 포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예술가였다. 매우 사소한 곳에서 삶을 포착하여 관찰하며 추적하였고,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나 머뭇거리는 삶의 현장에서 기다렸으며, 삶이 걸어가면 함께 걸어가고, 삶이 뛰어가면 함께 뛰어가며 삶이 어디에 어떤 속도로 존재하건 위대하고 매력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로댕이 말년을 보낸 파리의 '오텔 비롱'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구해준 아름다운 저택이다. 로댕은 이 저택과 함께 소장한 미술품 모두를 국가에 기증하고 떠났다. 웅장하고 유명한 작품들뿐만 아니라 아주 사소하고 작은 습작과 미완의 작품들로 넘치는 그곳은 로댕 미술관이 되어 릴케가 묘사한 현장의 느낌들을 생생하게 전시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 곳곳의 미술관에서 로댕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으며 미국의 필라델피아 로댕미술관은 파리의 로댕미술관과 같은 시기에 개관하여 또 하나의 아름다운 문화공간이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로댕의 진품이 있는데, 1994년 당시 삼성문화재단이 약 100억 원에 구입한 ‘지옥의 문’이 7/12 에디션과 ‘칼레의 시민’ 12/12 에디션이 바로 그것이다. 태평로 미술관 플라토가 1999년 처음 개관할 때 이름이 ‘로댕갤러리’였던 것은 그 작품들의 상설전시와 함께한 사연 때문일 것이다.

지난 가을, 새 차를 계약하고 세 달을 기다렸다가 예정일보다 20일쯤 늦게 인도 받았다. 그날은 평소에 흠모하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탄생일과 같아서 새 차의 애칭을 ‘릴케’로 명명하였다. 처음 예정대로 차가 나왔더라면 ‘로댕’이라 이름 붙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산다는 것은 예측불허의 만남과 우연한 일들의 연속이라 순간을 포착하고 해석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 아닐까? 릴케는 로댕을 만나 더 위대한 시인이 될 수 있었고, 소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기차 여행 중에 루 살로메와 릴케를 만난 뒤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훗날 ‘닥터 지바고’라는 대작을 남길 수 있었다. 한 세기를 빛낸 교학상반(敎學相伴)의 아름다운 본보기로 ‘릴케의 로댕’ 혹은 ‘로댕의 릴케’를 잊을 수 없겠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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