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그가 채링크로스 길을 걸으며 서점 진열창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보비가 자기 반쪽인 재키와 맞은편 인도를 한가로이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도리스 레싱의 1957년 작품집 ‘사랑하는 습관’의 한 장면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피폐해진 런던 풍경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이 작품을 읽던 주말 아침에 어떤 감정이입으로 기쁨과 슬픔이 파도처럼 요동쳤다. 책을 덮고 오후의 거실에 앉아 평소처럼 무료 VOD 영화를 찾다가 마땅히 볼 것이 없어 그 다음 저렴한 1,200원짜리 영화 한 편을 골랐다.

쉐샤오루(薛晓路) 감독의 ‘Book of Love(不二情書)’는 마카오 카지노에서 빚더미를 벗어나지 못하는 탕웨이(汤唯)와 LA 부동산 중개인으로 성공한 우슈보(吴秀波)가 각자 인생에서 우연히 접한 재수 없는 책 ‘채링크로스 84번지’로부터 시작되는 영화다. 현실에 대한 염증을 털어버리고자 각자 손에 쥐어진 그 책을 런던의 해당 주소로 보내버리고,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책은 편지와 함께 다시 돌아온다. 기대하지 않았던 답장에 재답장으로 새로운 인연을 낳는다. 기다림이 싹트고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잔잔함이 아름답다.

시인 굴원의 고향 호북성 출신 노부부를 만나 소동파, 왕유, 유우석, 범중엄의 ‘악양루기’ 등으로 이어지는 동양문학의 고급스러운 대화가 한껏 흥미롭고 시기적으로도 ‘헬렌 한프 탄생 100주년’이 겹쳐 서양문학과 조화를 이룬다. 현실은 잔혹함 자체라 모든 인간관계는 가식덩어리라는 LA의 다니엘과, 책 거래로 시작된 헬렌과 프랭크의 운명적인 만남도 있는 법이라는 마카오의 지아오가 주고받는 편지가 시절인연을 엮어낸 명작이다. 영화의 여운으로 서점에 들러 ‘채링크로스 84번지’ 한 권을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는 그저 어쩌다 책에 특이한 취향을 갖게 된 사람일 뿐이에요. 전부가 퀼러 쿠치(Sir Arthur Thomas Quiller-Couch, 1864~1944)라고 하는 캠브리지 교수 덕분이죠. Q라고 알려진 분인데, 열일곱 살 때 어느 도서관에서 우연히 맞닥뜨렸죠. 그리고 제 생김새를 말하자면, 브로드웨이의 걸인만큼은 총명하게 생겼다고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늘 좀이 슨 스웨터에 모직 바지를 껴입고 있답니다. 낮에는 난방을 해주지 않거든요. 이 아파트는 5층짜리 붉은 벽돌집으로 세입자들이 오전 9시면 출근하여 6시까지 텅 비는데, 주인이 뭣 하러 1층 사는 보잘 것 없는 대본 검토인 겸 작가 한 사람 때문에 난방을 해주겠어요? 가엾은 프랭크 , 제가 그분을 너무 못살게 굴죠.“
- 27쪽, 1950년 4월 10일, 뉴욕의 헬렌 한프가 런던의 ‘세실리 파’에게 보낸 답장 중에서

1949년 가을, 런던 채링크로스 84번지에 있는 ‘마크스&Co. 중고서적’의 광고를 본 뉴욕의 ‘헬렌 한프’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절박하게 구하는 도서 목록을 적어 권당 5달러가 넘지 않는다면 어느 것이라도 구매하겠다는 내용의 첫 편지를 보낸 것이다. 서점의 관리인 ‘프랭크 도엘’은 목록 중 2/3에 해당하는 도서를 정리하여 청구서와 함께 친절한 첫 답장을 보내고 거래가 시작된다. 이듬해 봄이 되자, 동료 세실리가 몰래 편지를 보내 프랭크의 됨됨이나 외모, 가족 관계 등을 귀띔하며, 뉴욕 아가씨에 대한 호기심을 보이자 위와 같은 답장이 도착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에는 물자가 귀했고, 미국에는 책이 귀했다. 필요한 책을 찾아 달라고 편지를 보내는 뉴욕의 헬렌과, 일주일에 육류 60g과 한 달에 하나 씩 지급되는 계란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박봉의 서점 노동자 프랭크의 시절인연은 그런 배경 속에서 시작된다. 고객과 서점 직원의 관계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깊은 유대감으로 정이 들어간다. 뉴욕 깍쟁이 헬렌은 자신보다 몇 살 많은 런던 신사에게 책을 빨리 보내주지 않는다는 짜증과 일상의 투덜거림으로 무안을 주기도 하지만 바탕에는 더없는 신뢰가 깔려 있었다.

새 책보다는 헌책, 손때 묻은 책을 선호하는 헬렌은 채링크로스 84번지에서 구입한 책들과 교감하며 생활의 동력을 이끌어 간다. 영국의 시인 겸 소설가 퀼러 쿠치를 너무도 사랑해서 그에 대한 자료와 책들에 특히 애정을 보이는 그녀는 가난하고 이름 없는 무명작가다. 까다롭게 책을 찾아 달라 요구하고, 받아 본 책에 대해 지적질도 멈추지 않는 진상고객일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공손함을 잃지 않는 프랭크와 런던의 친구들을 위해 푸짐한 식료품 소포를 챙겨 보내는 헬렌의 마음 씀씀이는 훈훈하다.

“이제야 편지를 하는 것에 심히 죄책감이 드는군요. 하지만 독감 탓으로 돌려주시길. 2주 동안이나 서점에 나오지 못하다가 돌아오니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 있었습니다. 우리 도석 목록의 카툴루스는, 당신 편지를 받기 전에 이미 팔려버렸지만, 라틴어본이 수록되어 있고 운문은 리처드 버턴 경 번역에 산문은 레너드 스미더스 번역, 대활자판으로 인쇄된 것으로 한 부 보냈습니다. 전부 해서 3.78달러입니다. 제본은 그다지 훌륭하지 않지만 상태가 꽤 좋은 깨끗한 책입니다. 지금은 없지만 토크빌 책도 찾아드리도록 애쓰겠습니다. 메건은 아직 여기 있지만 남아프리카로 가서 살 궁리를 하고 있답니다. 우리가 그러지 말라고 설득 중이죠. 세실리 파한테는 중동에 있는 남편에게 간 뒤로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년이면 돌아올 겁니다. 기꺼이 브루클린 다저스를 응원하지요. (중략) 노라와 동료들이 크리스마스와 새해 인사 전해달랍니다.“
- 100쪽, 1955년 12월 13일, 프랭크 도엘이 헬렌 한프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얼굴도 모르는 만남은 처음 프랭크에서 서점 직원들로, 다시 서점 밖 사람들로 차츰 넓어진다. 삶의 고단함을 견디는 위안이자 애틋한 그리움으로 점철된 관계의 확장이다. 헬렌은 프랭크에게 식료품을 보내주고, 프랭크의 아내는 그중 분말달걀을 이웃집 할머니에게 나눠주고, 뉴욕의 먹거리로 배를 채운 팔순의 메리 볼턴은 손수 만든 식탁보를 헬렌에게 선물한다. 런던의 친구들은 그녀의 런던 방문을 학수고대하지만 사정이 녹록지 않다. 노라와 볼턴 부인은 기꺼이 숙소 제공을 약속하지만 항공료까지 부담해줄 형편이 안 되고, 헬렌도 비행기 표를 살 돈이 없다.

다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라 5,000km의 대서양 장벽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다. 런던에 일이 있어 서점에 들른 친구나 여행 중에 그곳에서 환대받은 친구들 소식에 얼마나 부러웠을까? 긍정적인 그녀는 부러움을 내색하는 대신 친구에게 답장을 보내 여분의 나일론 양말 몇 켤레를 프랭크의 딸들에게 선물해줄 것을 부탁하는 여유로움이 아름답다. 1953년 6월 1일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 즈음에 계획했던 첫 방문이 충치 때문에 물거품이 되자, 치과의사 조이 선생의 신혼여행 경비를 자신이 지불하느라 다음으로 미뤄야겠다는 재치 있는 농담도 유쾌하다.

서점을 관두고 남편을 따라 이라크로 떠난 세실리와 런던 생활에 지친 사장 비서 메건 웰스가 남아프리카로 떠났다가 돌아와 다시 호주로 향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마치 도리스 레싱의 ‘사랑하는 습관’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는듯한 우울함을 호출한다. 새 차는 대부분 수출용이라 국내에서 구입하려면 7~8년이 걸리고, 낡은 차라도 갖고 싶다던 도엘 가족이 드디어 1939년식 낡은 차를 구입하고 빈털터리가 된 사연은 기쁨의 역설이다. 입원한 노라가 보건국의 무상의료 혜택을 받게 되었다는 사연도 영국의 경제 발전과 사회 안정을 비추는 거울이다.

“단란한 우리 가족의 최근 사진을 몇 장 동봉합니다. 더 잘 나온 사진이라면 좋을 텐데, 제일 잘 나온 것들은 친척들에게 줘버려서요. 실라와 메리가 얼마나 닮았는지 아시겠어요? 한눈에 보이죠. 프랭크는 메리가 아직도 자라는 중이긴 하지만 그 나이 때 실라를 빼다 박았다고 그래요. 실라의 어머니는 웨일스 출신이고, 나는 에메랄드 섬(아일랜드의 별명) 출신인지라 두 아이 모두 프랭크를 닮은 것이 틀림없지만, 두 아이가 프랭크보다 잘생겼지요. 물론 그이는 그렇다는 걸 인정하지 않지만요. 내가 편지 쓰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신다면 내가 불쌍해질 거예요. 프랭크는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은 종이 위의 재주가 볼품없다네요.“
- 114쪽, 1958년 5월 7일, 노라 도엘이 헬렌 한프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노라는 전쟁 중에 아내를 잃은 애 딸린 홀아비와 결혼한 마음씨 고운 아일랜드여자다. 결혼 2년차 아직은 신혼이던 노라는 남편 프랭크가 뉴욕의 한 아가씨와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에 때때로 질투심이 일었겠지만 내색하지 않고 친구처럼 오래 교유하며 때때로 남편 흉도 함께 본다. 늘 가족의 편지를 편지에 동봉하고 배급이 원활하지 못한 시절부터 미국산 식료품으로 채워주던 고마운 뉴욕 친구에게 감사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어려운 시절을 견디는 런던 서민의 일상이 가계부처럼 그녀의 편지 속에 어렴풋이 녹아 있다.

봄마다 책을 정리해서 다시 읽지 않을 책들은 못 입는 옷을 버리듯이 내버리는 뉴욕의 여인에게, 헌책을 골라 보내는 런던의 남자는 책의 속표지에 남겨진 글이나 책장 귀퉁이의 메모로 교감하고,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글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대신한다. 지금은 LA로 옮긴 브루클린 다저스와 풋볼클럽 토튼햄 스퍼스를 응원하는 소시민의 일상도 아름답다. 맨해튼 95번가에 살았던 헬렌은 아파트 개축공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쫓겨나 72번가 이스트 305번지로 옮기느라 영국행 여행 경비를 이사비용으로 소진하며 7년째 가을을 맞는다.

“친애하는 헬렌, 틀림없이 놀라실 텐데, 버지니아 울프의 ‘일반 독자’ 두 권이나 우송 중입니다. 원하는 다른 것이 있다면 동일한 효율성과 신속성을 발휘하여 구해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우리는 모두 잘 지내고 있고, 변함 없이 그럭저럭 해나가고 있습니다. 큰딸 실라(스물네 살이에요)가 2년 전에 느닷없이 교사가 되고 싶다며 비서 일자리를 버리고 대학에 들어갔답니다. 아직 1년이 남았고, 따라서 아이들 덕을 보며 호사를 누리려면 아직도 한세월을 보내야 할 것 같군요.“
- 132쪽, 1963년 10월 14일, 프랭크가 헬렌 한프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20세기 초를 대표하는 소설가였던 버지니아 울프(1882~1941)의 비평집으로 국내에는 ‘보통의 독자’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The Common Reader’의 1,2권을 어렵사리 구해 보내는 업무 편지에 큰딸 실라의 소식을 담아 보낸다. 딸을 사랑하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늘 고단한 아빠의 고민이 녹아 있다. 여러 편지 속에 사무엘 존슨의 셰익스피어론, 중세 영국 최대의 위대한 시인 제프리 초서, 헤밍웨이를 생각나게 하는 존 던의 한 구절을 인용한 방송용 대본 쓰기, 윌리엄 블레이크, 생 시몽, 로마시인 카툴루스에 대한 지적인 대화가 즐겁다.

무려 20년 동안 지속된 편지는 프랭크 도엘이 중심이지만, 사장 벤 마크스는 57년의 편지에 살짝 등장하고, 세실리 파, 빌 험프리스, 메건 웰스, J. 펨버턴도 오랫동안 교유했지만 세월이 흘러 하나둘 씩 서점을 떠나갔다. 도중에 서점에서 가장 나이 많은 조지 마틴의 죽음이 있었고, 건강상의 이유로 가족이 있는 곳으로 떠난 볼턴 부인의 소식은 가슴 아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슬픈 소식은 1969년 1월에 새로운 비서 조앤 토드로부터 받은 매우 건조한 편지였다. 1968년 12월 22일에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그리운 프랭크의 타계 소식이었다.

“오래전에 아는 사람이 그랬어요. 사람들은 자기네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러 영국에 간다고, 제가, 나는 영국 문학 속의 영국을 찾으러 영국에 가련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더군요. ”그렇다면 거기 있어요.” 어쩌면 그럴 테고, 또 어쩌면 아닐 테죠. 주위를 둘러보니 한 가지만큼은 분명해요. 여기에 있다는 것.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 받은 사람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서점 주인 마크스 씨도요. 하지만 마크스 서점은 아직 거기 있답니다. 혹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 145쪽, 1969년 4월 11일, 헬렌 한프가 런던 여행을 떠나는 캐서린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프랭크와 헬렌은 책을 사고팔다가 친구가 되었다. 무명의 헬렌이 유명 작가가 된 것은 프랭크와 주고받은 편지 덕분이었다. 아빠가 헬렌의 편지를 처음 받은 날, 아홉 살에 불과했던 실라는 그 시절 헬렌과 같은 나이의 숙녀가 되어 런던으로 헬렌을 초대했다. 처음 런던을 찾은 헬렌은 사라진 서점 자리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50년이 더 흐른 뒤, 스마트폰 구글맵스를 열고 ‘84 Charing Cross Road’를 검색하니 마크스&코 중고서적이 있던 그 자리에 진한 녹색의 맥도날드 간판이 걸려 있었다. 낭만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문득,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써야겠다.

출판기획자로 ‘더불어민주당’+‘the민주’ 당명을 만들고 제안했다. 컴퓨터그래픽 및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이며,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온라인뉴스팀 (news@next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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