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거둘까?”
“잘 생각했네. 봉평장에서 한번이나 흐뭇하게 사본 일 있을까. 내일 대화장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네.”
“오늘밤은 밤을 새서 걸어야 될 걸?”
“달이 뜨렷다?”

-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에서

어느덧 9월이다. 계절은 달력 읽을 줄 안다는 듯 순식간에 바뀌었다. 아직 더운 기운의 끝은 조금 남아 있지만, 가을의 시작임에 틀림없다.

이때쯤이면 강원도 봉평에서는 메밀꽃 축제가 시작되었을 테다. 매번은 아니더라도 종종 들러서 감상했던 정경은 늘 그리움으로 남는다. 9월이 되면 봉평을 떠올리고, 그곳의 메밀꽃밭을 그리워하고, 연례행사처럼 이효석 작가를 생각하는 것도 가을맞이 병치레 중 하나다.

몸을 움직여 직접 가보진 못하고, 도서관에 들러 문고판 ‘메밀꽃 필 무렵’을 빌려와서 펼쳐놓고 읽는다. 읽어나가다가 위 인용구에서 턱 걸린다. 드팀전의 허생원과 조선달이 나누던 이야기에서 ‘도대체 봉평장에서 대화장이 얼마나 멀기에 밤을 새서 걸어야 하는 걸까?’ 궁금해져 버린 거다. 개한테도 못 주는 버릇이다.

포털 지도 서비스를 열어 검색을 하고야 만다. ‘봉평장’은 대략 현재 봉평재래시장(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소재) 정도에 위치했을 것이다. ‘대화장’이라고 언급한 곳도 마찬가지로 평창군에 소속된 대화면의 대화시장 근처일 것 같다.

드팀전은 봉평장에서 대화장까지 이런 길로 걸었을 것이다
드팀전은 봉평장에서 대화장까지 이런 길로 걸었을 것이다

길찾기를 해 보면 위 화면과 같다. 자동차 이동 기준으로 17.18Km, 약 29분 소요될 거라고 알려준다. 도보 평균 시속을 3Km/h 정도로 잡아보면 대략 6시간 정도 소요될 거리다.

현실을 잠시 떠나서 소설 속 공간으로 가보자. 이 길에 나서는 때는 메밀꽃 피는 9월의 어느 밤이며, 드팀전은 그냥 걷는 게 아니라 나귀에 짐을 실고 가야 하며, 지도의 등고선으로 짐작컨대 큰 고갯마루를 넘을 일은 없어 보이지만 전형적인 강원도 옛길을 걸어야 할 것까지 감안하면, 그들 말대로 꼬박 ‘밤을 새서 걸어야 될’ 상황이다. 그렇게 떠난 길 위에 그들의 소원대로 달이 떠서 비추고, 거기에 ‘메밀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을 막히게’ 하는 풍경을 연출한다. 그 얼마나 멋진 장면인가?

문학, 특히 소설은 공간정보와 아주 밀접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소설 구성의 3요소’로 ‘인물, 사건, 배경’이 있으며, 이 가운데 배경은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으로 이루어지고, 그 공간적 배경이 바로 공간정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도 많지만, 개연성에 충실한 사실주의 작품들을 읽다 보면 작가가 그려놓은 그 당시의 공간이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다가온다. 문학은 훌륭한 공간정보 중 하나다.

아일랜드의 더블린 시에서는 매년 6월 16일 ‘블룸스데이(Blooms day)' 행사가 열린다. 블룸(Bloom)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소설 ’율리시스‘에 나오는 주인공 레오폴드 블룸을 가리킨다. 그 소설은 주인공 블룸이 1904년 6월 16일 하루 동안(오전 6시부터 다음 날 새벽 2시까지) 더블린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겪은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블룸스데이가 되면 더블린 시민은 물론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블린 시내 곳곳에서 1900년 대 초반 복장으로 코스튬 플레이를 한 채 소설 속 루트를 따라 걸어다니며 작가와 작품을 추모한다. 100년이 지난 소설이, ‘지금, 여기, 우리’로 대변되는 현재의 공간 내에서 매년 부활한다.

1904년 6월 16일 블룸이 남긴 발자취가 매년 되살아난다
1904년 6월 16일 블룸이 남긴 발자취가 매년 되살아난다

미국 소설가 댄 브라운의 인기 추리소설 ‘다빈치 코드’도 ‘다빈치 코드 투어’라는 여행상품으로 승화한 적이 있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영국 등 국경을 넘나들며 펼쳐진 박진감 넘치는 소설의 공간을 직접 즐기기 위해서 방문한 관광객은, 그곳에 들러 작가가 텍스트로 그려놓은 공간을 눈과 발로 음미한다. 소설 속 공간을 가상세계에서도 훑어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KML 파일을 만들어서 공유하기까지도 한다.

소설 속 공간은 훌륭한 상품이 되고 공간정보로 공유된다
소설 속 공간은 훌륭한 상품이 되고 공간정보로 공유된다

아일랜드에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소설이 있다. 모더니즘 계열의 대표적인 작가라는 것을 증명하듯, 소설 속 공간을 사실적인 기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소설가 구보씨가 걸었던 1930년대 경성의 풍경은 어땠을까? 청계천 천변에 거주하던 구보씨가 아침에 집에서 나와서 하루 종일 거닐었다고 그려져 있는, 종로네거리 - 화신상회 - (전차 이동) - 부청 앞 - 경성역 - 조선은행 - 광화문통- 낙원정으로 이어지는 공간은 더블린을 거닐던 블룸의 행적 못지 않다.

‘블룸스데이’ 행사 수준은 아니지만, 서울연구원에서도 2015년 ‘1930년대 서울길, 구보씨와 함께 걸어볼까?’라는 제목으로 인포그래픽스를 제작하여 발표하며 문학 속 공간 발굴을 시도하였다. 2009년에는 ‘구보따라 걷기’ 행사를 진행한 적도 있었다고는 하나 일회성에 그친 점이 아쉽다.

문학 속 공간적 배경은 남아 있고, 그 공간을 통해 추억할 수 있다.

긴 추석 연휴가 다가온다. 연휴 기간에 짬을 내서, 아니면 고향을 들러 올라오는 길에 잠시 옆길로 빠져서, 청포도가 익어간다는 이육사의 고향 안동을 찾아보고, 탁류를 떠올리게 했던 군산항에 들러 채만식의 시선으로 금강 하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이제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거나 얼룩백이 황소가 게으른 울음을 운다던 정지용의 옥천에도 들러보면 어떨까?
정 움직이기 어렵다면 지도 위에서 문학 속 공간을 찾아 나서는 문학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지도는, 문학을 품기에도 넉넉한 품을 가졌으니 말이다.

임영모 0duri@naver.com 대학교에서는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였다. 컴퓨터잡지사 기자로 시작하여, 애니메이션, 출판, 모바일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후 GIS 업계에 종사한 지 10년이 넘었다. GIS 분야에서 전통적 GIS보다는 인문학 기반의 다양한 공간정보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 지도를 통해 볼 수 있는 다양한 시각과 활용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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